[중국30년] 사상의 해방과 실사구시1

사상의 해방, 실사구시

 

모택동이 사망한 지 불과 몇시간도 채 안되어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은 각 종 모임을 갖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향후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비록 모택동이 자신의 후계자로 화국봉을 지명하였지만 강청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인방은 여전히 화국봉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화국봉과 당과 군의 온건파 지도자들은 사인방을 체포하여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중국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모택동 사후 이틀이 지난 후 화국봉이 비밀리에 중남해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본래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모택동의 영전에서 시신을 지키고 있었는데, 은밀히 이선념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화국봉은 몸이 매우 불편하여 북경에 소재한 한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중남해에 도착하자 서둘러 황성근 9호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당시 이선념의 임시거주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화국봉은 오늘 자신이 그에게 간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이선념에게조차 통보하지 않았다. 정상정인 상황하에서 최고의 지도자들이 이처럼 미리 통보하지 않고 만나는 것은 의전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 화국봉을 자신의 문 앞에서 본 이선념은 매우 놀랐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집무실로 화국봉을 안내한 후 바로 문을 잠궜다. 화국봉이 이선념에게 먼저 말을 꺼냈고, 이들의 대화는 불과 몇 분만에 끝났다. 화국봉은 이선념에게 사인방이 정치국회의 석상에서 자신을 공격한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들은 이미 자광각에 전화선과 전국 각 성과 연락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했음을 설명했다. 따라서

 “‘사인방과 투쟁하는 것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최적기이다. 이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화국봉의 이 결의에 찬 그러나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한 말에 대해 이선념은

 

당신은 이미 마음에 결정을 내렸읍니까?”

 

화국봉은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고 답했다.

또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을 제거할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할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그는 이선념의 얼굴 표정을 면밀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선념 동지께서 동의해주신다면, 저를 대신해서 엽검영 원수를 만나 사인방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제거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인방은 현재 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직접 엽 원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제가 지금 선념 동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게된다면 이 역시 문제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선념동지가 엽장군을 만나야만 합니다.”

 

평소 사인방의 죄상과 음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선념은 화국봉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동시에 최대한 빠른 시간에 엽장군을 만나겠다고 대답했다.

당시 화국봉은 매우 긴장하고 있었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했다.

저는 지금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결국 이들의 만남은 10분이 채 안되어 끝이 났다.

3일 후 이선념은 자신의 경호원에게 머리가 무거우니 향산의 식물원에 가서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를 태운 차량이 식물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돌연 기사에게 서산에 위치한 엽검영 장군의 집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지시하였다. 화국봉이 며칠 전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를 찾아온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경호원에게 조차 미리 통보하지 않고 엽 장군의 집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10 6일 모택동이 사망한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국가주석 화국봉과 엽검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은 사인방을 체포하기 위한 행동에 착수하였다. 합동작전은 화국봉의 비준하에 사인방을 각각 체포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동시에 중앙인민방송국과 인민일보를 급습하여 이 두 기관을 장악했다. 이로써 수년간 지속되어 온 극좌세력의 전횡으로 인한 고통은 그 종점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다. 결국 이들의 역사시기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1977 2 7일 모택동이 사망한 지 약 5개월이 지났을 때 <인민일보> 등 두 개의 신문에서 한 편의 사론을 발표하여, ‘전 중국은 당의 지휘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이 사론은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온 진리의 표준을 검증하는 것에 대한 거국적인 대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이 토론 후에 중국은 변화되었다. 이 사론은 전 공산당도 화국봉이 제출한 두개의 범시(대강)”를 준수 할 것을 호소하였다. 사론은 무릇 모택동의 제출 하에 결정된 정책에 대해 우리들은 모두 그 결정을 유지학 지켜야 하며, 모주석이 지시한 것은 우리들은 시종일관 변경하지 말고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통속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모택동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면 우리는 그저 믿어야 하고, 모주석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그것이 무엇이던 우리는 해야만 한다.”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중앙의 주석이었고, 당내외의 최고책임자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두개의 범시는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찍이 중앙당교의 부교장이었던 형분사가 이 논쟁에 개입되었다. “’두개의 범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러한 방침은 실제적으로 모택동이 과거에 추진했던 모든 결정을 옹호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제출된 결정을 포함하여 그가 제출하여 결정한 내용을 수정하거나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모두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형분사는 당시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원의 부소장이었다. 그는 말하길 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비록 그들이 당원이던 비당원이던 간에 사람들은 모두 이번 결정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마땅히 변해야 한다.”, 특히 일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어떠한 교묘한 비평도 이 역시 관방의(정부의) 관점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러한 관의 입장이 <인민일보>에 발표된 것은 매우 큰 권위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정확한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해결의 실마리가 될 변화가 빨리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7 3 10일부터 22일까지 중앙의 업무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전운은 등소평이 당중앙에 소속되어 당중앙의 영도자그룹에 합세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이 회의가 끝난 후 ㅎ1977 4 10일 아직 그 직무를 회복하지 못한 등소평은 화국봉, 엽검영 그리고 중앙위원회에 한 통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 그는 우리들은 세세손손 사용할 만한 완벽한 모택동의 사상으로 우리의 전공산당, 모든 군대, 그리고 전국의 인민들을 지도해야 하며, 당과 사회주의 사업, 국제공산주의 운동 사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앞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등소평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적하고 있는지 명백하게 알았을 것이다.

5 24일 두 명의 중앙판공청 책임자와의 대화석상에서 등소평은

 

“‘두 개의 범시는 유물사관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민감하게 그러나 예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범시를 말하지 않았고, 레닌과 스탈린도, 심지어 모택동 동지 자신도 범시를 말하지 않았다.”

 

1977 7 16일부터 21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0 3중전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사인방이 타도된 후 엽검영 원수와 같은 당내의 원로들은 등소평의 직무를 회복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전체회의는 <화국봉동지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임명를 추인하는 결의> <등소평 동지의 모든 직무를 회복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곧이어 등소평의 모든 직무가 회복되었다. 이로써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정국위원, 상무위원, 중국공산당 중앙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직에 복귀하였다. 특히 관건이 되는 직무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의 지위를 회복한 것이다.

1977 7월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중앙부주석과 국무원 부총리의 직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시급하게 주도해야 하는 업무로 요구된 것은 과학과 교육부문의 업무였다. 대학입시를 회복하는 것은 동소평이 혼란과 반대를 뿌리뽑기 위해 제일 먼저 돌파해야 할 임무였다. 7 19일 등소평은 교육부에 요구하여 처음으로 과학과 교육문제를 다룰 좌담회를 소집하였다. 좌담회는 8 4일부터 8일가지 거행되었다. 이 좌담회는 등소평이 직접 주도하였다. 그는 입시의 상황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우리들은 반드시 금년 내에 입시를 부활해야 합니다.”

 

결국 등소평의 말대로 입시가 부활되었다. 입시를 회복한 것은 천만 가정은 물론 중국 미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고, 결국 성공했다. 이로 인해 등소평은 엄청난 명예를 획득할 수 잇었다. 또한 사상을 해방하고, 혼란을 진정시키는 돌파구를 만들게 되었다.

등소평은 당시 이미 70대의 일개 노인이었지만, 모택동 사후 다시 복권되어 중국의 궤도와 역사를 변화시켰다. 등소평은 화국봉의 두 개의 범시를 겨냥하여 실사구시실천이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논리를 사용하여 그들 공격하였다. 전자는 모택동의 초기사상을 이성적 이해로 갱신한 것이고, 지난 20년의 광폭한 시기의 의식구조를 파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자는 전국적인 대토론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이 부지불식간에 싹트고 있었다. 중국인민들은 혁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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